
※인류실존의 해체와 자연상태로의 회귀
설국열차는 기본적으로 크리스트교의 다양한 고전을 모티브로 차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예컨대, 그리스도의 자기희생, 요나와 물고기, 노아의 방주, 존 번연의 『천로역정』, 단테의 『신곡』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재들은 전통적 크리스트교의 가치와는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다.
역사관, 실존주의, 자연상태라는 세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역사관-카르마(여기서 카르마는 '업'이는 사전적 의미보다는 그 단어가 담지하고 있는 무목적적으로 순환하며 폐쇄적인 실존 체계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설국열차의 배경인 기차는 독특한 역사관을 함의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끝칸부터 엔진칸까지 일렬로 연결된 기차는 일종의 직선적인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크리스트교적 역사관으로, 역사는 궁극적으로 종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국열차에서 보여지는 직선적 역사관은 크리스트교의 역사관과는 차이가 있다. 즉 크리스트교에서 말하는 종말은 목적이 있는 '끝맺음'이다. 하지만 설국열차에서의 엔진칸에는 '끝맺음'이 없다. 더욱이 목적도 없다. 주인공인 커티스는 기차의 끝칸에서 엔진칸까지 왔지만, 그의 목적은 단지 엔진을 차지하기 위해서일 뿐, 그 이상의 목적은 없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전도만 있을 뿐, 근본적인 체계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엔진을 차지하는 것은 영화상에서 나타나는 인류의 한계상황과 무목적적인 실존을 극복하는 것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기차 자체가 끝없이 순환하는 레일 위를 맹목적으로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설국열차에서의 인류는 끝없는 카르마의 세계에서 단지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 세계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차를 세우거나, 기차에서 탈출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극 중, 남궁민수만이 자신은 '다른 문'을 열고 싶다고 말할 뿐이다.
2. 실존주의
설국열차에서의 인류는 열차의 앞칸부터 끝칸 사이의 특정 칸에 존재한다. 인류 개개는 아무 목적도 없이, 특정 '자리'에 내던져져 있을 뿐이다. 그 실존은 자본주의적 계급이라는 매개를 통해 드러나지만, 사실 영화 상에서 계급의식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그보다는 그 실존적인 부조리, 즉 '시스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고 할 것이다.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요하다. 질서는 곧 '자리'이다. 인류 개개가 실존적 '자리'를 유지할 때, 시스템은 존속될 수 있다. 영화 속에서는 종교와 혁명, 인류의 덕성도 시스템의 일부분일 뿐이다.
감독은 '시스템'을 선악으로 말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말그대로 인류의 부조리한 실존을 담담히 해체할 뿐이다. 극 중 윌포드와 길리엄, 커티스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다. 즉, 각자의 '자리'가 있을 뿐이다. 윌포드조차도 인류를 존속시켰으며, 계속적인 존속을 위해 시스템을 유지할 뿐이다. 물론 사명감이나 목적성은 없다. 윌포드는 자신의 자리에 무료함마저 느낀다. 이러한 실존에서의 해방은 아마 '자살' 밖에는 없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든지...
3. 자연상태
설국열차를 단순히 '디스토피아'를 파헤친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 설국열차는 인류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문화와 종교, 정치, 도덕 등은 하나의 조작된 '시스템'에 불과하다-극 중 총리의 이름이 '메이슨'이라는 점이 하나의 복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반동적인 혁명조차 그러하다. 거기에는 어떠한 목적도 없다. 단지 출발한 열차가 멈춰서지 않게 하기 위해 필요한 허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점에서 설국열차는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류의 존속을 위해 조작된 '시스템'이 바로 인류를 얽매고 무지하게 하며, 불행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연상태'로 돌아가는 방법 밖에는 없다. 영화의 결말에서 인류는 단 두명의 어린아이만 남을 뿐이다. 이들은 흙을 밟아본 적이 없는, 즉 설국열차 이전의 세계를 경험한 적이 없으며, 또한 열차에서의 경험도 많지 않은 백지상태의 존재로 어떠한 문명도 남겨져 있지 않은 하얀 설원에 던져진다. 이들은 완전한 자연상태의 '신인류'인 것이다. 사족이겠지만, 마지막에 생존한 두 아이는 서구적 관점에서는 문명의 변방이었던 황인종과 흑인종이다.
4. 뉴에이지적 함의
봉준호 감독이 종교적 관점까지 염두해 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뉘앙스에 비추어 볼 때, 뉴에이지적인 함의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국열차의 카르마적인 세계관과 부조리한 시스템에서의 궁극적인 해방은 그 열차에서 탈출하는 방법, 즉 '다른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방법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초월이고, 신인류의 탄생이다. 실제로 극 중 마지막 생존자 중 한명인 요나는 성경 속에서의 선지자와 동명의 인물로 투시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크리스트교의 선지자보다는 헤세의 '데미안'을 더 닮아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설국열차에는 '개인의 영성'은 있을지언정, 그 흔한 '휴머니즘'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의 사상적 흐름을 굳이 두 종류로 나누자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아폴론적인 것이 합리적 이성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이 영화는 디오니소스적인 사상적 흐름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인본주의적인 전통 위에서는 아폴론적인 것에서 말하는 '계몽'이나 디오니소스적인 것에서 말하는 '초월'이나 인류의 자존을 얘기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다라고 할 수 있겠다. 즉 그 둘은 모두 모더니즘적인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결론
개인적으로 설국열차는 짜임새있게 만들어진 영화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세세한 부분에서 다소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메세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진 영화라고 볼 때, 그 메세지가 가져오는 긴장감들이 몇몇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몰입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한다. 그러한 점에서 설국열차는 꽤나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수작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유쾌한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