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한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

그의 죽음을 듣고

사는 것이 참 허망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것 하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삶,

우리가 바라는 것은 설령 그것이 정의와 같은 선한 가치라 할지라도

이 땅에서는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이내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사회생활이란, 먹고 사는 일이란 그런 것이다.

 

불현듯 죄책감 비슷한 동요가 일었다.

어느 시인의 시처럼, 세상을 몸으로만 읽는 데 골몰한 것일까?

그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건 일종의 자위였을 터.

 

 

 

 

무작정 찾아간 분향소에서 조문을 한 후,

조심스레 권한 방명록을 받아 들고서

사실은 그의 꿈에 대해서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준비한 것처럼 몇 마디 빠르게 써내려 갔다.

 

“대한민국의 소중한 친구를 잃었습니다.

당신의 남은 꿈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무엇인가 부끄러움에 쫓기어 황망히 분향소를 떠나려는 나에게

그의 마지막 유언이라며 작은 두루마리와

더운데 발걸음해 고맙다며 생수 한병을 건내왔다.

그가 살아 있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젊은 친구, 물 한 모금 하고 가소.”

라고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꿈꾸던 세상에 기대어 살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보태준 것이 없는데,

가는 사람에게 속도 없이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와 물 한잔만  또 빚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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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입니다

노무현입니다

노무현 입니다

노무현입니다

  그가 죽던 날, 나는 한평 남짓의 고시원 작은 쪽방에 있었다. 고상함이라는 허울에 숨기 급급했던, 어리석고도 길었던 10여 년의 대학생활을 끝내고 나는 다시 두려움을 피해 고시원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그 해는 여러 면에서 질문이 많았던 해였다. 아무런 준비없이 직면한 나의 무능력 앞에 걸어 왔던 지난 날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며 4개월 계약직 인턴으로 나름의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게 뭐라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喪 중에 나는 면접을 보러 갔고, 나의 무능력함 때문인지 어떤 이들은 나를 떠나 갔다.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내가 투표권자가 된 후, 처음으로 내가 뽑은 대통령이었지만 실상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했다. 인권변호사로서 정치인으로서 그가 걸어온 길을 알지 못했고, 그의 정치적 견해나 신념도 알지 못했다. 나는 그런 것을 알만큼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된 후, 그의 정치적 행보를 100%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쉽게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일종의 파격(破格)이었다. 완벽한 사람은 아닐지언정 나같이 무능력한 이들과 함께, 그들처럼, 경상도 말로 '데도록' 고민해 줄 것 같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을지 모를 그런 인격적 특질이 나는 좋았다. 그의 죽음 후 며칠동안 나는 잠들지 못했다. 고시원 쪽방에서 대리운전을 마치고 돌아온 옆방 식구의 고단한 퇴근소리를 들으며, 나는 일기를 썼다.

 

몽환(夢幻)-불면증

 

잠결에도 심장소리를 듣는다. 그 녀석이 잠투정하듯 내 어둠 속 어딘가를 뒤척이면, 나 역시 어두운 방 이리저리 잠자리를 고쳐 눕는다. 방은 아주 어둡지는 않다. 방문 위로 난 작은 창 너머로 아직 잠들지 않은 삶의 불빛이 어른거린다. 도로 이편에서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자동차 소리와 간간이 이어지는 인기척, 그리고 오늘따라 유달리 그르렁대는 바람소리가 창문 틈새로 내 심장을 엿보고 있다. 사실 내 불면(不眠)의 이유 자체가 몽환이다. 아무런 의미없이 사라져버릴 그런 소음들에게 나의 추악함과 연약함, 공허함이 해부되어지고 간파당할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에... 사는 건 뭘까?

 

산다는 것은 기다림의 연속인가? 살면서 많은 것들을 기다리고, 그래서 실망하고 지치기도 했다. 때로는 개인적인 성취와 영적인 부요함을, 때로는 사회정의를... 하지만 결국 산다는 것은 그 분이 내 기다림의 전부라는 것을 알아간다는 것일까? 이 말이 갖는 의미의 풍성함과 부요함과 영광스러움을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 분이 내 기다림의 전부이기에 나는 더이상 두렵거나 지치지도, 실망치도 않는다'고 멋을 부려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못내 겸손한 척, '필요이상으로 두려워하거나 지치지도, 실망치도 않는다'고 고쳐 말한다. 물론 그것마저 곧 허세로 드러날테지. 나는 나의 필요를 깨닫고 선택할 수 있을만큼 선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 분은 선하시다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다만 나는 그 분 안에서 그리고 믿음 안에서, 이 불면의 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영적 예배로 드린다고 가난하게 간구할 뿐이다. 나의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51:17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유다서1:24~25

 

2009. 05. 26.

 

노무현 입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나에게 정치적 절망감을 안겨준 또 하나의 사건은 현재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재판 중인 또 다른 한 대통령의 당선이었다.

 노무현 입니다

 

차가운 공기의 무게를 느끼며 출근하다,

무섭게 한편의 시가 떠올랐다.

외투 깊숙이 의문 부호 몇 개를 우겨넣고
바람의 철망을 찢으며 걸었다, '겨울, 우리들의 도시', 기형도

우리는 더 큰 불의에 직면하게 되리라. 더 큰 무지에 직면하게 되리라. 더 큰 무력감에 직면하게 되리라. 더 큰 절망의 철망을 찢으며, 그날이 그날같은 하루를 걸어야 하리.

어제 저녁부터 줄곧 '하박국'을 생각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불의를 목도하고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박국 1장

... ...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의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부재감이 이렇듯 감사로 바뀔 수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부재하시는 것만 같은 역사속에서 세상의 모든 슬픔과 절망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견디어 내신다. 하나님의 부재, 머리를 흔들며 '하나님은 없다'(시편 10편) 하는 모든 조롱에 오래 참으시며, 당신의 백성이 느끼는 하나님의 부재감 속에 '실존하시며', '일하신다'.

'모든 삐걱이는 슬픔에게 저벅저벅 돌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다.
하나님께서 모든 불의와 슬픔을 오래 참으시며 기어이 하신 그 일..
견고한 죄의 철망을 찢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일..
우리에게 말씀하신 지상명령 역시 그 것일 것이다.

나는 나의 짐을 대신 짊어질 영웅을 원했으나,
그분은 나를 원한다 하시고, 당신의 멍에를 지라 하신다.
우리의 절망 위에 그분의 나라가 서는 것을 보라 하신다.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5:4-5

울지 말라.. 울지 말라..

마라나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

 

2012. 12. 20.

18대 대선 다음날.

 

 

  지난(至難)한 10여 년 간의 사건들이 지나간 오늘, 나는 그의 대통령 당선과 죽음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10여 년이 지나도록 못났을지언정, 나는 한 가정을 떠받치며 '먹고 사는 문제'를 '데도록' 고민하는 가장이 되었다. 나 같이 못난 이를 위해 '데도록' 고민해줄 것 같은 그가 떠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가 '데도록' 싸우고 있을 때 나는 그의 고통에 무관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무현 입니다

노무현입니다

노무현입니다

 노무현 입니다

  그는 그의 한 동지에게 '그가 꿈꾸는 세상'이 올 때에 그 곳에 자기가 없을 것 같다며, '그 때가 오면 내가 없어도 상관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가 없는 지금 그의 친구가 '그가 꿈꾸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또 다른 대통령이 되었다. 사실 나는 막연히 두렵기도 하다. 어떤 식으로든 또 다른 실패를 경험하게 되지는 않을지... 하지만 그가 떠나던 날, 그의 노란 풍선이 하늘로 날아 올랐다. 그는 수많은 노란 풍선을 남기고 떠났다. 그것은 꿈이고 '보통 사람'은 아닐런지... 사나운 소나기를 맞으며, 슬픈 역사의 대열을 지킨 '보통 사람', '진짜 먹고 사는 문제'를 데도록 고민하는 '보통 사람'이 아닐런지...

 

  역사가 설령  라그나로크를 향할지라도 나는 그런 '보통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그는 또 한번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2017. 05. 27.

노무현입니다 노무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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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실존의 해체와 자연상태로의 회귀

 

  설국열차는 기본적으로 크리스트교의 다양한 고전을 모티브로 차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예컨대, 그리스도의 자기희생, 요나와 물고기, 노아의 방주, 존 번연의 『천로역정』, 단테의 『신곡』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재들은 전통적 크리스트교의 가치와는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다.

 

  역사관, 실존주의, 자연상태라는 세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역사관-카르마(여기서 카르마는 '업'이는 사전적 의미보다는 그 단어가 담지하고 있는 무목적적으로 순환하며 폐쇄적인 실존 체계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설국열차의 배경인 기차는 독특한 역사관을 함의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끝칸부터 엔진칸까지 일렬로 연결된 기차는 일종의 직선적인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크리스트교적 역사관으로, 역사는 궁극적으로 종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국열차에서 보여지는 직선적 역사관은 크리스트교의 역사관과는 차이가 있다. 즉 크리스트교에서 말하는 종말은 목적이 있는 '끝맺음'이다. 하지만 설국열차에서의 엔진칸에는 '끝맺음'이 없다. 더욱이 목적도 없다. 주인공인 커티스는 기차의 끝칸에서 엔진칸까지 왔지만, 그의 목적은 단지 엔진을 차지하기 위해서일 뿐, 그 이상의 목적은 없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전도만 있을 뿐, 근본적인 체계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엔진을 차지하는 것은 영화상에서 나타나는 인류의 한계상황과 무목적적인 실존을 극복하는 것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기차 자체가 끝없이 순환하는 레일 위를 맹목적으로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설국열차에서의 인류는 끝없는 카르마의 세계에서 단지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 세계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차를 세우거나, 기차에서 탈출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극 중, 남궁민수만이 자신은 '다른 문'을 열고 싶다고 말할 뿐이다.   

 

  2. 실존주의

 

  설국열차에서의 인류는 열차의 앞칸부터 끝칸 사이의 특정 칸에 존재한다. 인류 개개는 아무 목적도 없이, 특정 '자리'에 내던져져 있을 뿐이다. 그 실존은 자본주의적 계급이라는 매개를 통해 드러나지만, 사실 영화 상에서 계급의식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그보다는 그 실존적인 부조리, 즉 '시스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고 할 것이다.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요하다. 질서는 곧 '자리'이다. 인류 개개가 실존적 '자리'를 유지할 때, 시스템은 존속될 수 있다. 영화 속에서는 종교와 혁명, 인류의 덕성도 시스템의 일부분일 뿐이다.

  감독은 '시스템'을 선악으로 말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말그대로 인류의 부조리한 실존을 담담히 해체할 뿐이다. 극 중 윌포드와 길리엄, 커티스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다. 즉, 각자의 '자리'가 있을 뿐이다. 윌포드조차도 인류를 존속시켰으며, 계속적인 존속을 위해 시스템을 유지할 뿐이다. 물론 사명감이나 목적성은 없다. 윌포드는 자신의 자리에 무료함마저 느낀다. 이러한 실존에서의 해방은 아마 '자살' 밖에는 없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든지...

 

  3. 자연상태

 

  설국열차를 단순히 '디스토피아'를 파헤친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 설국열차는 인류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문화와 종교, 정치, 도덕 등은 하나의 조작된 '시스템'에 불과하다-극 중 총리의 이름이 '메이슨'이라는 점이 하나의 복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반동적인 혁명조차 그러하다. 거기에는 어떠한 목적도 없다. 단지 출발한 열차가 멈춰서지 않게 하기 위해 필요한 허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점에서 설국열차는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류의 존속을 위해 조작된 '시스템'이 바로 인류를 얽매고 무지하게 하며, 불행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연상태'로 돌아가는 방법 밖에는 없다. 영화의 결말에서 인류는 단 두명의 어린아이만 남을 뿐이다. 이들은 흙을 밟아본 적이 없는, 즉 설국열차 이전의 세계를 경험한 적이 없으며, 또한 열차에서의 경험도 많지 않은 백지상태의 존재로 어떠한 문명도 남겨져 있지 않은 하얀 설원에 던져진다. 이들은 완전한 자연상태의 '신인류'인 것이다. 사족이겠지만, 마지막에 생존한 두 아이는 서구적 관점에서는 문명의 변방이었던 황인종과 흑인종이다.

 

  4. 뉴에이지적 함의

 

  봉준호 감독이 종교적 관점까지 염두해 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뉘앙스에 비추어 볼 때, 뉴에이지적인 함의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국열차의 카르마적인 세계관과 부조리한 시스템에서의 궁극적인 해방은 그 열차에서 탈출하는 방법, 즉 '다른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방법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초월이고, 신인류의 탄생이다. 실제로 극 중 마지막 생존자 중 한명인 요나는 성경 속에서의 선지자와 동명의 인물로 투시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크리스트교의 선지자보다는 헤세의 '데미안'을 더 닮아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설국열차에는 '개인의 영성'은 있을지언정, 그 흔한 '휴머니즘'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의 사상적 흐름을 굳이 두 종류로 나누자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아폴론적인 것이 합리적 이성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이 영화는 디오니소스적인 사상적 흐름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인본주의적인 전통 위에서는 아폴론적인 것에서 말하는 '계몽'이나 디오니소스적인 것에서 말하는 '초월'이나 인류의 자존을 얘기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다라고 할 수 있겠다. 즉 그 둘은 모두 모더니즘적인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결론

 

  개인적으로 설국열차는 짜임새있게 만들어진 영화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세세한 부분에서 다소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메세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진 영화라고 볼 때, 그 메세지가 가져오는 긴장감들이 몇몇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몰입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한다. 그러한 점에서 설국열차는 꽤나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수작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유쾌한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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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도 두 번을 봐 버렸다..

수완형과 한 번, 누나와 한 번..

 

인생관, 인간관, 구원관, 역사관, 세계관 등의 방대한 주제가

날실과 씨실처럼 완벽하게 짜여진 영화..

최근 몇 년 동안, 이만한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이런 것과는 무관하게라도 누나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던 이유는

이게 바로 '기독교'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

물론 영화 끝나고 나오면서 누나는 혁명과 선거에 대해 말했지만,

나는 아무 말 않기로 했다..

 

"바리케이트 저편 어딘가엔

그리던 낙원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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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토오꾜오 올림픽을 앞두고 지은 지 삼 년밖에 안된 집을 부득이 헐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지붕을 들어내자 꼬리에 못이 박혀 꼼짝도 할 수 없는 도마뱀 한 마리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 동료 도마뱀이 그 긴 시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이를 날라다주었기 때문이다.

-박성호 칼럼, 茶山포럼, 2007년 1월 11일-

 


때론 한 줄의 기사가 그 숱한

'가공된 진실'보다 더 시다웠다.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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